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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학대회와 기타등등 겹쳐서, 토요일은 죽은듯이 쉬고 그 다음날부터 하루에 에세이 다섯 개씩 쓰고 예일대 강의 하나씩 듣고 캐나다 간 엄마 대신 밥하고 빨래개고 밑반찬 만들고.. 아.. 스피킹 어째 ㅠ_ㅠ 여하튼, 어떻게든 잘 되겠지요 ㄱ- 쓰고 싶은 글은 많은데! (늘 하는 소리)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리플 빨리 못 달아드려서 죄송해요 ㅠ_ㅠ (실은 이 블로그의 고질적 병폐) 다녀오겠습니다 ;ㅅ; 퍽 오랜만에 공대생 친구 S군과 조우했다. 계절학기가 마악 끝난 7월의 어느 저녁, 친구는 일본라면집의 긴 탁자에 팔꿈치를 괴고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아아. 경영 수업 말야. 아무래도 망한 것 같아. 음? 어이, 에이플러스 받아올 거라고 그랬잖아. 으... 이번 한번만 봐줘. 실은 말야, 이런 일이 있었다구. "뭐? 선생님한테 '만점짜리 발표문의 완성본이나 예시 같은 게 있으면 좀 보여달라'고? ... 저기.. 그거, 잘못하면 엄청 시비조로 들릴 텐데." "...어. 사실 그랬어. (한숨) 안 그래도 공대생 남자 다섯이 우르르 몰려갔으니. 난 좀 말리고 싶었지만 점수가 워낙 엉망이기도 했고 차마." "...하아. 엄청난 일 했네... 여선생님이었잖아. 임팩트가 컸을 텐데." "...하지만 말야, 공대에선 일상다반사인걸. 우린 문제가 안 풀리거나 프로그램이 안 돌아가서 잘 모르겠으면, '퍼펙트한 예시를 보여달라'고 한다고. 그게 당연한 거고. 배우는 학생이 교수에게 얼마든지 요구할 수 있고, 교수도 그걸로 상처받진 않는걸..." "...정말?" 순간 아연했다. 위의 시추에이션, 문대생 모드로 시뮬레이션 가동. 역사/사회/영문/국문과, 기타등등의 교수님께 C+이 뜬 레포트를 들고 가서 "왜 제 점수가 이런지 궁금합니다. 확실히 증명하기 위해 만점짜리 레포트의 모델을 보여주십시오." 라고 해보자. ...다른 문대생들도 그럴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경험에 한해선 뺨이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다(특히 교수님이 사회학과나 사학과 쪽이면 더더욱). 잘 해봐야 돌아오는 건 헛웃음이나 비웃음 정도가 아닐까. 그래, 점수가 궁금한 건 이해할 수 있어도, 좀더 나아가 어디가 안 좋은지 지적해 달라고 할 수 있어도, 납득하지 못했으니 만점짜리 레포트의 예시를 보여달라는 건 확실히 무리수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홀이 미세하더라도 어긋맞는 건 어긋맞는 것. "아. 하긴... 너흰, 답이 하나니까. 언제나." "응. 답이 하나니까, 답으로 이르기 위한 모델도, 공식도 완벽한 하나뿐이야. 교수는 그걸 보여줄 의무가 있다구. 학생은 배우는 입장이잖아, 어디까지나? " "과연. 승패가 확실히 갈리는 세계인걸. 모 아니면 도, 0 아니면 1이라... 우린 보통 글빨로 승부라서. 양도 양이겠지만 애초에 글이란 딱 잘라 가르는 기준이 없으니까.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간극인가. 아. 생물방 최선생님이 왜 내게 '사이언스를 하려면 터프해야 해!'라고 했는지 알겠다." "그런 말을 했어?" "으응... 승패가 분명히 판가름나기 전까진 엄청 싸워야 할 거 아냐? 뭐 수학처럼 답이 하나가 아니라도, 최적optimizing이란 건 있을 거 아냐. ...선생님도 본질적으론 이과대 출신이었고." 그는 소리내서 웃었다. "어. 사실 그래. 맨날 싸워. 문제풀이 과정을 죽 얘기하면 아 이 바보야, 여기 다 틀렸네, 내 답이 맞다고, 웃기시네 아니라고 나중에 제대로 까 볼래, 기타등등. 서로 절대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아. 일단 내 답이 옳은 거지." "으윽. 상처받아 버릴 거 같아. 역시 이몸은 온순한 모범답게 문학이나 해야 하는 건가." 익살스럽게 말하고는 라면을 휘휘 저었다. "응. 그렇게 되면 조교만 불쌍하지 뭐. 왜냐면 조교는 자기 연구 분야가 따로 있어서 학부 수업은 관심도 없고 잘 모르는 경우가 있거든. 그치만 학생들은 교수에게 가서 따질 게 있으면 먼저 조교한테 온단 말야? 왜 이거 틀렸냐, 증명하라, 납득하도록. 클래스가 40명이면 40명 죄다. 우와. 러쉬 당하는 거 보고 있으면 정말 불쌍해." "그... 그렇구나. 이쪽 문과대 세계에선 조교란 일종의 예수 같은 존재로서... 저렙인간인 학부생과 만렙의 신과 같은 교수를 연결하는 중간자... 교수 얼굴 보기조차 힘들고, 왜 내 학점이 이렇게 나왔나 따질 수조차 없는 수업도 있다구..." "윽, 그러면 이쪽에선 폭동이 일어날지도... 우리는 기본적으로 1,2,3차 시험 다 공개하거든. 공개해서 붙여놓고 확인하는 거야. 어디가 틀렸나, 왜 틀렸나, 가서 하나씩 대조해 볼 수 있어. 아까도 말했지만 클래스 전원이 거의 다 들러서 확인해. 다음 시험 보기 전까지 정정기간인 거지. 오차라도 있으면 큰일나려구." "음, 확실히 이쪽도 젊은 선생님들은 그렇게 많이 하시더라. 기준 명확히 해서 항목마다 구체적으로 점수 내시는 분들. 그렇지만 전통적으로 태도점수, 라는 것도 굉장한 몫을 하니까.. 가령 조교를 하면 무조건 에이플러스, 인 경우도 있고." 문득 한숨이 나왔다. 심리학사 학점. 제길. 아버지뻘 선생님께 착한 딸처럼 제대로 부비지 못한 내 죄다. "...확실히 다르다. 나, 지금까지 전혀 몰랐어. 공대의 수험 스타일." "응. 나도 경영대 수업 들어보기 전까진 전혀 몰랐어. 많이 당황했어. 사실 그분이 98학번이신데, 우리에게 '지금 무시하는 거냐'고 화를 내셨다고..." 친구는 풀 죽은 표정으로 남은 라면을 후루룩 들이켰다. "그렇게 스타일이 다르면 행동 패턴도 다른 게 당연하잖아. 몰라서 그랬을 뿐이지, 그러니 다시 한번 말해 보는 건..?" "지금은 무리인 것 같아. 말한다고 이해해 줄 것 같지도 않고... 솔직히 그분이 공대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기도 했고." "무슨 편견? 내가 종종 너 놀릴 때 하는- 수염을 안 깎는다거나 늘 쓰레빠만 신는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우리더러 '연구만 하지 말고 머리를 쓰라'는 거야. 여기선 '창의성'이 필요하다고. 그건 좀 심하잖아." 난 헛웃음을 흘렸다. "그게 무슨 헛소리? 머리는 지금도 김나도록 많이 쓰고 있잖아! 핀트가 다르다고 너무 비하하신다 그분." "...쩝. 공대생이니까 그렇게 보이는 거겠지. 그땐 화났는데 뭐 지금은. 그래도 좀 알았어. 그쪽 분위기랄까, 방식이랄까." "하하하. 어이, 경영대가 문과의 전부는 아니라고. 이과대랑 공과대 분위기가 다른 것처럼. 그렇지만 확실히... 얘기 들어보니 알겠어." 그렇다. 목적하는 바가 다르다. 다소 거칠게 나누어, 이쪽(문과대)의 최대 관심사를 한 점으로 수렴하면, 인간. 그쪽(이공대)은, 인간 아닌 사물. 이쪽은 답이 여러 개. 그쪽은 답이 한 개. 당장은 사소해도 장르별 엔딩의 차원은 상상을 초월한다. 문제를 보는 관점도 접근하는 방식도 엄청나게 달라진다. 관점과 방식이 달라지면, 각 분야에 속한 사람들의 태도 역시 엄청나게 달라진다. 소통이 잘 안 되는 건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단지 다루는 지식을 서로 모르는 건 둘째치고, 태도 말이다. 세상과 사람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태도. "나, 공대생이 연애에 벅차하는 이유 좀 알겠다. 단순히 바쁜 거 빼고." "그, 그런가." 난 녀석을 보면서 씨익 웃었다. "터프한 공학도의 마음으로 여자를 대하면 십중팔구 도망가버릴걸요~!" "...푸핫. 하긴..." "응. 이거 잘못됐어, 절대 틀렸어, 용납할 수 없어- 올 오어 낫씽! 이라는 태도는 학문의 영역 밖으로 나가버리면 낭패를 많이 볼걸. 여자는 알고리듬이 아니라구. 그러니까 사물도 사물이지만, 가끔은 인간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실은 그런 녀석들 많아. 주변에." "...역시." "아마 그래서 경영대 필수 이수 두 과목을 넣은 거겠지. 열라 연구해도 우리가 어떻게 팔아먹을지 모르면 당하기만 한다는 교수님들의 우려로 추가됐다더라고 (여기서 그는 웃었다) 나름대로 좋은 경험이었어. 성적은 걱정되지만..." "솔직한 심정으로~. 경영 두 과목보단 심리 두 과목이 인간을 이해하는 덴 훠-얼-씬! 도움이 되겠지만. 뭐 패스." 문과대의 인문학도(경영대는 저리 가서 너희들끼리 따로 놀앗!), 이공대의 과학도. 언제쯤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까? 언제쯤 얼마나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언제쯤 어떻게 서로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을까? C.P.스노의 Two Culture만 봐도 알 수 있는걸. 빅토리아 시대부터 이미 반목은 극에 달했다는걸. T.S. 엘리엇이 황무지를 쓰고 로스트 제너레이션이 세계의 종말을 고하던 그 시절이, 과학도들에겐 물리학자 러더퍼드가 선언한 bon voyage, 엘리자베스의 시대였다는걸. 난 과학을 좋아하고, 과학적인 사고방식에도 어느 정도 익숙하다. 그 녀석도 순혈 공대생이라기엔 취미가 문과대스럽다. 그러니까 서로를 얼마간 이해하고, 또 이해해 보려 할 여지가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세상엔 그렇지 않은 인문학도- 혹은 과학도가 더 많을 것 같은 건, 단지 내 사소한 우려일까. 그런 생각을 머금고 라면집을 나섰다. 그래도 다행이다. 적어도 내겐 공대생 친구 녀석이 있으니까. 잘 모르면, 물어보면 되니까. 그럼 섣불리 편견으로 재단하는 일 역시, 줄어들 테니까. 우린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고 먹을 수 없는 것들을 이야기해. 너희는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고 먹을 수 있는 걸 다루지. 둘 모두, 충분히 나름의 의미와 가치가 있어. 그 점 잊지 않으려고 해. <전반적인 내용: 이 행사의 뒷얘기. 뭔가 스펙터클한 내용 같은 것은 없습니다> 일곱 시에 일어났다. 배치는 우당교양관이었다. 간밤에 일정을 체크하니 세 시 이십 분부터 세션 시작. 인촌기념관의 등록접수는 여덟 시부터였다. 전원 일곱 시에 오라고 했지만, 순순히 따를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실행한 지각. 미필적 고의...라기엔 거창하고 실은 그냥 늦잠.-_-; 8시 반께 도착해 명찰과 티셔츠를 받아들었다. 기념 펜이 수북히 쌓여 있길래 녹색과 보라색, 두 개를 골라 가방에 넣었다. 현장은 그야말로 우왕좌왕. 지저분한 건 뒷방에 아무렇게나 숨겨놓았더라. 그러면 그렇지. ![]() <인촌기념관 102호를 대충 치워 만든 뒷방. 이런 거 몰래 찍는 거 좋아한다. 수면 위 우아한 폼으로 떠 있는 백조의 발은 정신없이 움직인다든가. 사실 카메라 들이대기 민망해서 허겁지겁 찍느라, 사진 전부가 엉망으로 흔들렸다.> 가방은 본부 105호실에 던져두고, 주머니에 카메라와 핸드폰을, 만일을 대비한 복사카드와 한 장짜리 연락처 및 지침 페이퍼, USB를 주머니에 쑤셔넣고 방을 나섰다. 왼손에는 핸드북, 오른손엔 펜. 오케이, 롸져. 아임 레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 <우당교양관 안쪽에 붙어 있던 포스터. 네에 하지마리마스요.> 그 순간 갑자기 폰이 울렸다. 나이스 타이밍. 받아보니 같이 펜 다녀온 아는 언니. 저기, 신청만 해놓고 연락을 아무것도 못 받았는데... 너밖에 아는 사람이 없어서. 오늘 가도 되는 거야? 2차로 받은 ppt 명단에 있어? 문자는? 전화는? 맨 처음의 엑셀파일 명부 빼고는 하나도 못 받았어. 아는 교수님 전화받고 겨우 일어난 거라... 그런 거면 그냥 와. 와서 부딪치면 어떻게든 해줄걸. 도착하면 교양관 105호로 와서 나한테 연락해. 그동안 대학원생 총책임자 찾아서 이어줄테니까. 조직에 참여해본 사람들은 알 수 있겠지만, (학교 내에서) 비영리로 운영되는 조직은 생각 이상으로 허술하다. 일단, 직접 학회 차원에서 컨택을 하고 일정을 짜고 기획하는 분들은 내가 알 수 없는 부분이니 언급을 패스하고, 현장에서 뛰는 스태프 조직에 대한 얘기다. 바쁘게 뛰어다니는 윗선의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보통 똑똑하니까 모든 일을 혼자서 다 하려든다. 2할의 책임자가 뛰어다니는 사이, 할 일을 마땅히 모르는 8할의 아랫사람들은 물어보려다가도 포기하고 그냥 논다. 혹은 어디 들어갈지 몰라서 구석에서 꾸물거린다. 상명하달이 명확하지 않아서, 헤맨다. 그러니까 당연히 어딘가는 과잉이고 어딘가는 부족이다. 그 부족분을 메꾸기 위해 건물 어딘가에서 멍하니 놀고 있을 사람들을 끌어다 효율적으로 쓰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왜냐하면 혼자서 다과 주문하고, 복사기 들여오고, 각종 가위랑 칼 등 챙겨오고, 인원 배치 확인하고, 출석 부르려면 뇌가 25개로 분할돼도 모자랄 지경일 테니. 뭐, 이런 상황에서 나 같은 독고다이 타입은 즐겁다. 내 할일 찾아 알아서 해두고, 누군가 도와달라면 도와 주고, 기타 시간에 적당히 숨어 재미있는 걸 챙기면 된다. 너무 이기적인가 (웃음) 길 가던 대학원생 언니를 붙들어 물어보았다. 신경질적인 답변이, 쓱 보니 자기 담당인 일 처리하기에도 바쁜가 싶었다. 표정이 이미 다른 데 할애할 여유가 없다고 외치고 있다. 포기하고 그 주위를 적당히 지켜보니 대빵인 것처럼 오가는 언니가 한 분 있었다. 무전기와 이어폰을 낀 차림이 예사롭지 않아, 가서 물어보니 예측이 맞았다. 쉬지 않고 명령을 내리며 전화를 받으면서도 지친 기색 없이 냉정하게 내게 답했는데, 그 모습이 일단 다행스러웠다. 일단 데리고 오란다. 역시. ![]() <이때가 약 오전 아홉 시 무렵. 아직 준비가 덜 됐다. 열심히 한글자모로 만든 전시물을 걸고 있는 남자분께 화이팅.> ![]() <이와 대조적으로, 접수하느라 바쁜 인촌기념관 스태프들.> 할 일이 없으니, 놀고 있기보다 미리 준비를 해두기로 했다. 아홉 시 이십 분쯤, 내가 담당한 교양관 311호의 세팅이 끝났다. 기자재는 이미 최종 오리엔테이션에서 전부 체크한 탓에, 모든 게 순조롭게 돌아갔다. 복도를 서성이고 있으려니 가방을 든 중년의 남자분이 들어가시길래, 쫓아 들어갔더니 역시나 당일 세션에서 발표하는 분이셨다. 학교 컴퓨터는 USB를 넣을 때마다 번번이 마법사를 실행하는데, 중간에 꺼버리면 아예 아무것도 인식 못한다. 사소한 문제지만 모르면 낭패다. 간단히 도와드리고 파일을 옮긴 다음, 음성기호 폰트도 같이 설치했다. 그분은 일찍 와서 다행이라고 땀을 훔치며 나가셨다. 음, 얼리 버드가 계시구나. 종종 돌아다니면서 체크해야겠는데. 그 다음으로 워싱턴 대학에서 온 조그만 금발의 할머니가 들어왔다. 2초간 당황했지만(...) 미국인을 상대하는 접대용 미소와 함께 잘 세팅해 드렸다. 파일네임을 수정해서 폴더에 넣고, 화면에 폴더 창을 열어둔 후 아예 스크린도 같이 내려 두었다. 혹시나 내가 교실에 없는 사이에라도 알아서 세팅하고 갈 수 있도록. ![]() <이곳이 그곳. 조촐한 크기다. 덕분에 빌려온 마이크는 필요 없었다.> ![]() <3층 Refreshment Place. 그래봤자 강의실 책상 다 밀고 몇 개만 남긴 거다. 이때가 11시 무렵이었다. 배도 고프고 아무도 없길래 몇 개 집어먹고 싶었지만 소심한 마음에 참았다.> 언니가 105호로 들이닥쳐, 책임자가 돌아오실 때까지 얘기를 좀 나누었다. 최근 진로를 언어교육학 쪽으로 바꾸었다고 했다. 본래 스페인어 이중이라 남미 지역학 쪽을 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었나, 하고 물어보니 그쪽은 에, 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뭐 우리가 다 그렇지. 자꾸자꾸 바뀌고, 혼란스럽고, 한참 길 찾을 무렵. 다 그렇지. 지난 학기에 4.5 띄웠는데 장학금 안 주더라. 응. 나도 4.4 띄웠는데 안 주던데? 9학기라서. 우리는 마주보고 웃었다. 에휴. 공부해서 돈 벌기 참 힘들지. 그치. 책임자에게 티셔츠를 건네받고, 언니는 3층 다과로 배치가 되었다. 점심 먹을 시간이 되었는데 김밥이 오지 않아, 근처의 작은 까페로 나갔다. 일자리 알선의 도움으로 빠니니를 얻어먹고 돌아왔더니 한솥에서 도시락이...(...) 이런. 내일부터는 꼭 챙겨 먹도록 하겠어! 문득 생각이 나 교실로 돌아가려니, 왠 남자애 둘이 들어간다. 가 보니 시원하게 머리가 벗어진 교수님 한 분이 혀를 끌끌 차고 계시고, 다른 둘은 컴퓨터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어머, 누구시길래 제 나와바리에서 뭐하시나요(웃음). 어리버리하게 서 있는 녀석들에게 사뿐사뿐 다가가 USB를 빼앗(..)아 착착 세팅을 마쳤다. 들어 보니 한 시간 반을 헤맸다고. ...역시 이 컴퓨터는 미묘하다. 사소하지만 모르면 어쩐지 작동이 안 된다. 결국 컴퓨터 담당하는 스태프들까지 불러온 건가 보다. 교수님은 호쾌한 목소리로 아니, 고대쯤 되는 녀석들이, 이렇게 헤매면 쓰나. 언어학의 올림픽이라구, 올림픽 기타 등등의 말씀을 이었고, 두 명은 머리를 긁으며 돌아갔다. 또 필요하신 건 없으십니까. 포인터가 있으면 좋겠는데. 네 지금 가서 찾아보겠습니다. 가져왔습니다. 여기 이 버튼 눌러서 쓰시면 됩니다. 창의 블라인드는 내리면 되겠습니까? 스태프가 하는 건 별거 아니다. 잡일이다. 그래도 내가 담당하고 책임질 곳, 이라는 생각이 들면 작은 일이라도 열성이 생긴다. 교수님은 꽤 만족한 듯한 표정으로 가방을 챙기셨다. 아까도 컴퓨터에 뜬 백신 경고 메시지를 보고, 이거이거 안 되겠는데, 바이러스가 있으면 어떡할 거야. 내 거라도 옮겨줘야겠어, 라며 자리에 앉으시던 분이니, 곰살갑게 챙기는 걸 좋아하시려나. 흠. ![]() <생각해 보니 7시부터 이곳에서 워크샵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시간에 이미 퇴근. 좀 고민하다 바탕화면을 아예 매뉴얼로 바꿔두었다. 스크린에 크게 띄워놓고 가면, 좀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문법이 정확한지 확신할 수 없지만... 읽진 마세요. 부크러워요. 이미 1번부터 관사 하나 빼먹고 -_-;> 세션을 체크했다. ...그동안 뭐라도 강의 들으며 맥락을 못 알아먹은 적은 별로 없었지만, 우와, 이번만큼은 무리. 좀 많이 무리. 무리의 거듭제곱. 토픽 없는 제너럴 세션이었는데, 첫번째 강의는 <Initial tensification in Korean loanword adaptation>. ....으음.... 한국어 빌린말(용어가 있을 텐데, 모르겠다)의 첫음 강세의 적용? ... 제목도 겨우 이해했는데 아스트랄한 내용이 펼쳐질 것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다. 뭐 어쨌든 좋아. 마음을 굳게 먹고 들어주겠어. 예상 외로 많은 외국인들이 들어왔다. 한국어는 그들에겐 다소 희귀한 소수언어일 테니까. 듣기로는 이번 학회의 테마가 <소수언어의 다양성>이라니, 한국어로 강의되는 세션도 있다고 들었다. 전반적인 내용은 모른다.-_-; 피피티 프린트를 지금이라도 주의깊게 읽으면 뭔가 몇 줄 더 적을 수 있겠지만 사양합니다. 아아, 수업시간에 애들이 이래서 자는 건가. 강의를 듣는데 머리가 아파오기는 처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수님, 스크립트를 줄줄 읽고 있어서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안 그래도 무맥락 상태인데. 엄청 긴장하셨는지 이마엔 땀도 흘렀다. 역시 영어는 한국인의 주적이다. 이건 언어학 교수님이라도 피해갈 수 없군. 마음속으로 조용히 응원을 보냈다. 질문 시간에 손을 드는 건 주로 외국인들이었다. 교수님은 아베 히로시를 닮은 멋진 일본인 학자에게 <파이프에 걸리는 첫음절 강세(빠이프)가 일본어식 발음에서 유래한 건 아닌지>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응답은 신통치 않았다. 일본어로 파이프는 파이프입니다. 끝. 네 아쉽네요. ![]() <아까의 호쾌한 교수님. 외대에서 오셨다고 한다. 수줍수줍한 태도로 선생님 강의하시는 모습을 찍어도 되겠습니까, 기념으로 남겨두고 싶습니다- 라고 했더니 매우 즐거워하시면서 허락하셨다. 크크.> 이 분의 주제는- <Theories of speech parts in the major early French and English grammers: Attempts of a proper theory for vernacular languages> 였다. 초기 불어와 영어 문법에 관한 스피치 파트의 이론이라. 음. 이거면 비교적 맥락을 잡고 들을 수 있겠는데? 좋아. 그러나 그 생각은 철저한 오산임이 곧 밝혀졌다: 교수님, 왜 불어로 강의하시나요! 간지나게!(...) 곧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나가고 사회자를 비롯해 의지의 한국인 서너 분 정도만 남았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나도 남았다. 마음 속으로 울며 외쳤다. 물푸레나무님 도와줘요. 아 지금 프랑스에 계시지. 20분의 강의 동안 알아들은 건 Angles 한 단어 뿐. 그리고 강의 후. 그들도 불어로 질문하는가! 두근두근하며 기다리자 곧 연배가 비슷한 분이 입을 열었다. <I think only Koreans are in here. Can I ask the question in Korean?> ...교수님 나이스. 그래서 덕분에, 최소한의 Summary를 한국어로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온전한 내용은 아니지만 간략하게만 설명하면, 16-17세기 수도사들이 만든 port-royal 문법책이 일종의 원조격으로, historic grammar 부분에 중요한 일조를 한다고 한다. 심지어 촘스키조차도 자기 연구의 원조라고 직접 말했을 정도. 프랑스에서 15-16세기 경 발전한 문법이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영문법의 2/3 이상은 불문법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면 됩니다.") 영문법에 영향을 끼친 결과, 17세기 중반에서부터 영국에서 통사론이 시작되어 18세기 중반에 한 분야로 자리잡는다. 그 이전까지 문법이라 함은 곧 품사론을 지칭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당시의 문법엔 오늘날 쓰는 용어들이 거의 수록되어 있었으며, 18세기 이후 영국의 통사론은 프랑스에도 역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다만, 문법의 역사가 언어의 역사와 늘 같이 가는 것은 아니며, 언어의 변화가 선행한 후 문법이 변한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 <교수님 열강. 수고하셨습니다.> 그 다음 발표자는 두 명으로, 내용은 <Prosodic innovations in Northwest Indo-European: Circumstantial evidence for prehistoric contacts> 라고 한다. 북미 인도-유럽 어족의 운율학적 발전... 정도 되려나.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들어왔고, 놀랍게도 밤톨 같은 형상을 한 교복 중딩이 스윽 들어오더니 맨 앞자리에 앉는 것이다. 오오. 호기심을 참지 못한 내가 물어보자 그는 심히 형형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언어학에 좀 관심이 있어서요." 대단하다. 천재소년인가. 자네가 인도-유럽 어족의 연구를 일으킬 재목이 될 자질이 있는지 지켜보겠네. 물론 거짓말이지만. 그러나 미안하게도..... 발표자가 펑크를 냈다. 무려 두 명이. 오 마이 갓. 사람들이 하나 둘씩 떠나거나, 내게 사정을 물어보거나, 인상을 쓰거나 했다. 일단 조금만 기다려 보시고, 가서 상황을 물어보고 다시 오겠다고... 했지만 이미 안 오는 사람을 어찌할거나. 층장에게 상황을 알리고, 사회자에게도 말씀드려 다음 발표는 기다렸다가 정시에 시작하기로 했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건가. (모처럼의 천재소년)을 포함해 떠나가는 사람들에게 괜히 내가 다 미안하더라. 다음 강의도, Prosodic에 관한 것이었다, <What determines the prosodic structures?> 였는데, 사례로 든 케이스는 경남 지방의 방언이었다- 피피티의 미디어를 틀자 구성진 사투리가 강의실에 울려퍼졌다. <요다 니 밥 안 묵나.> 푸훗. 분위기는 훈훈했고 반응도 좋았는데, 문제는 내가 운율학에 대해 일말의 조예도 없었다는 거다. 젠장. 이래서야 즐길 수가 없잖아. ![]() <이것도 몰래 나가서 반대편 문으로 들어와 찍었다. 찰칵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린 것 같아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열강이 아름답습니다 (웃음)> 마지막 강의가 끝나자 머리가 멍했다. 워크샵이 곧 이어질 테니, 따로 뒷정리는 하지 않았다. 저녁 파트는 대학원생이 담당하는 것이다. 인촌기념관까지 올라가 겨우겨우 출석을 마치고 나서 바로 귀가했다. 내가 언어학을 전공했더라면, 혹은 평소에 관심이 많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심리학대회가 있다면, 적어도 누가 누구인지- 그 누가 하는 강의가 어떤 의미을 지니며 또 어떤 내용인지 좀더 쉽게 알아먹을 텐데 말이다. 얼마 전에 한국에 왔던 거재니거라든가, 라팔이나 에스포지토, 디마지오라든가. 하지만 사회언어학의 일부 갈래 외엔 큰 흥미가 없고, 조예도 없으며, 시간도 없으니 열심히 일하고 다 일하면 적당히 재밌는 걸 찾아 돌아다니는 스태프의 한 명이 되는 수밖에요. 아하하. 이렇게 첫째날의 근무가 막을 내렸다. 보통은 연애를 주제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의미가 없으니까. 그래도 아주 드물게 그런 얘기를 적어보고 싶을 때가 있다.
살인의 역사를 읽다, 문득 만년필에 잉크를 채우지 않았다는 걸 떠올렸다. 가방에서 만년필을, 프린트와 책으로 잡다한 책상 귀퉁이에서 잉크를 집어왔다. 걸어나오다 침대 모서리에 잔뜩 쌓아놓은 책을 무너뜨렸다. 가끔 잠에서 깨면 양 뺨에 딱딱하고 각진 촉감이 느껴진다. 가끔은 배꼽이나 손목 언저리에서 뒹굴기도 한다. 책은 생각보다 불안정한 존재다. 남자처럼.
어떻게 자신할 수 있냐면, 나 역시 어떤 사람들에겐 미도리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실을 말하진 않았다. 어쨌든 그에게는 미도리가 아니므로. 매력은 그것을 볼 수 있는 이에게만 비로소 의미가 있으므로.
넌? 난 연예인을 좋아해본 적이 없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좋아. 대화하고 만질 수 있는 사람들. 뭐야, 잘 모르겠어 무슨 말인지. 자기도 희망이 없으면서 나한테만 가지라니- 응. 한 사람이라도 희망을 갖는 편이 낫지. 라고 나는 생각했다.
누군가 내게 물었었다. 무엇을 찾고 있나요. 그런 당신은 무얼 찾고 있나요. 나아갈 길. 당신은? 아름다움과 사랑할 사람.
아름다움과 사랑할 사람. 그건 기묘한 자리에서 기묘한 방식으로 툭 튀어나온 진심이었다.
난 언제나 이야기할 사람이 필요하니까. 내 목소리를 듣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볼을 어루만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그런 사람이 필요하니까. 세계는 희망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 같지만. 난 여전히 매력적인 척 웃고 능숙하게 대화하고- 심지어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만으로 어떤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때도 있지만, 돌아서면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까.
조금은 부러웠어. 너의 그 희망이 말이야. 내게 필요한 건 너의 미도리 같은, 상대일지도 몰라. 고백이나 선물이 아니라. 그러니까 너는 희망을 가져. 이루어진다면 좋겠어. 05ㅇㅇㅇ 님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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